최근 일부 대형교회 민낯에 대해 쓴 글의 애프터서비스라고 해두자. 독실한 크리스천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공익적 교회 역할이 매우 중차대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기대여서이다.

최근 한국 개신교는 볼썽사나운 교회 부자세습 논란 이후 시민사회로부터 집중적 성토를 받고 있다. 이로 인해 개신교 내부에서 대안교회를 지향하는 다양한 모색을 시도하고 있고, 그 대응 모델로 ‘작은 교회’를 추구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녹녹치 않다. 작은 교회 목회자의 생계문제를 둘러싼 대형교회, 침묵의 카르텔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일부 대형교회의 종교인들은 자신들이 누리는 호사와 교회 규모의 비대화를 해괴한 논리로 세상과 신도들에게 그간 정당화해왔다.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지만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의 엄혹한 고통은 나눠지려 하지 않았다. 성경의 '희년 정신'은 서로 나누는 개신교 본래의 공동체 정신이지만 규모화된 교회 증축이 신앙의 가치가 되면 부유하였지만 마음이 가난했던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따라갈 뿐임을 망각했다. 그 파열음은 교회 건축을 둘러싼 수많은 논쟁과 부자세습, 종교인 과세반대의 정점에서 목도되었다.

사회적 논란 끝에 작년 1월부터 종교인 과세가 시행되었다. 재정 관련 문제가 끊이지 않는 교회가 조세의 영역에 들어온 것이다. 굳이 성경을 꺼내들어 주장의 객관화를 입증하지 않아도 ‘함께 사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 첫걸음은 교회 재정의 투명성으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구분한 대로 예수는 '하나님의 도성'에 속한 그리스도인은 면세의 자유가 있지만, '지상의 도성'에서는 평화를 위하여 자유를 절제하고 세금을 '기꺼이' 내라고 권유하지 않았는가.

또한 이는 예수께서 제자 베드로에게 내린 명령이니, 가톨릭과 개신교를 막론하고 모든 기독교 성직자는 예외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종교인 과세 시행 이후, 청렴함을 기대한 성직자들이 어떻게든 세금을 절세해보겠다고 탈세에 가까운 질문들을 세무서에 쏟아낸다는 항간의 언론 보도는 참담하기까지 하다. 세상은 교회에 투명성과 청렴함을 기대하고 있다. 일반 기업 수준보다 교회에는 더 높은 도덕적 수준을 요구함을 도외시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돌이켜보면 종교인 과세는 사회적 책무를 넘어 작은 교회 성직자의 생계와도 직결되어 있다. 익히 알려진 일이지만 대게 작은 교회의 성직자들은 또 다른 직업을 통해 최저생계비를 보전한다.

물론, 작은 교회에 대한 후견적 역할을 소홀히 하지 않는 대형교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작은 교회 성직자의 최저 생계 문제는 대형교회의 시혜적 도움을 통해 실현되는 것이 아닌 국가 사회복지제도를 통해 보완되어야 할 일임을 반드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유효한 방법이 작은 교회 성직자들의 소득신고와 세금 납부이다. 이를 통해 사회복지 수혜 대상이 되는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대다수가 대놓고 반대했던 종교인 과세의 이면에 가려져 있던 작은 교회 성직자의 열악한 삶을 예수께서는 뭐라 했을까.

한국 개신교의 대형교회 문제는 한국 사회 최저임금 문제와도 잇닿아 있다. 통계수치로 말해주듯 최저임금 인상의 순수한 의도와 달리 경제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물론 최저임금의 정치적 의미를 외면할 순 없다. 그러나 촛불 이후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사 그러 들었다. 진영논리로 갈라진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은 결국 민생경제의 연착륙이다. 그것이 문재인 정부의 절체절명의 과제가 되었다.

노동인권을 등한시한 산업화 시절처럼 ‘건조한 성장’이 아닌 상생과 포용의 ‘체온 있는 성장’을 강조했지만 경제 현실은 냉혹하다. 일자리는 단편적으로 늘어났다지만 일자리의 질은 하락했다. 노동의 양극화는 심화되고 있다. 하위 소득 노동자들의 삶의 질을 높이겠다고 출발한 최저임금이 사회 양극화를 더 벌어지게 하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신앙 공동체를 지향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큰 교회와 작은 교회 간, 성직자 삶의 질은 양극화를 넘어 이질감으로 작동하고 있다. 목회사학연구소가 몇 해 전 성직자 904명을 상대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직자의 급여에 해당하는 월 사례비 부문에서 4인 가족 기준 최저생계비를 받지 못하는 성직자가 대법원 기준으로 전체 조사 대상 중 85.6%가 해당됐다. 4인 가족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성직자는 14.4%에 그쳤다.

개척교회에서 지난한 목회를 하고 있는 오래된 친구는 “교회의 사례비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게 법적으로 규정된 사항이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지켜질 수 없는 상황”이라며 현실적 고충을 토로했다.

한국교회는 마이너스 성장을 하고 있음에도 성직자는 대량으로 배출되고 있다. 현재 국내 신학교는 모두 200여 곳이며 매해 6000명 가까이 배출되고 있지만 대부분의 신학생은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있다. 종교적 문제를 넘어 이들은 소외계층이며 통계에도 채 잡히지 않는 청년실업자임을 정부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의 사회학적 의미는 ‘함께 살자’이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를 거론하며 과세를 반대했던 대형교회와 사회복지의 혜택만이라도 받겠다며 납세를 하겠다는 작은 교회를 보며 예수가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제일 먼저 어디를 찾으실까. 휘황찬란한 대형교회일까. 척박한 개척교회일까. 교회가 소외된 이웃을 위해 봉사한다거나 우리 사회의 더 나은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는 일 그리고 대형교회 성직자의 적극적 납세를 통해 작은 교회 성직자의 최저생계비가 지원될 수 있는 사회적 토대를 만드는 일, 예수 재림의 신앙적 마중물이지 않겠는가.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은 임금을 더 주기 싫어서가 아니라, 더 주기 힘든 상황에 내몰리고 있다고 한탄한다. 작은 교회의 신도들도 자신들을 인도하는 성직자에게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고 싶어 한다. 세상사에 지친 신도들을 위해 목회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 한다. 그러나 헌금의 규모에 따른 재정 현실은 녹녹치 않다. 대형교회 성직자의 적극적인 성실 납세가 작은 교회 성직자의 사회복지 수혜의 대안과 사회적 명분이 될 수 있음을 개신교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러하기에 조세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던 종교인 납세는 한국 사회 최저임금 안착의 바로미터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500년 전, 종교 개혁가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와 사회의 공익을 위하여"를 주창하였다. 그들은 결코 시민사회에 등 떠밀려 교회의 공공성을 말하지 않았다. 자기정화의 토대 위에서 교회의 공공성을 설파하고 주도했다. 최저임금으로 온 나라가 혼란스러운 이때에, 대형교회 성직자가 나서서 교회 공동체를 이뤘던 초대교회의 정신을 회복하고 더더욱 성실하게 납세하는 일, 예수의 가르침이다.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작은 교회 성직자, 신앙의 동력과 최저 생계를 위하여 마땅히 해야 될 목회자의 길이다. 그것이 낮은 것으로 임하였던 예수의 길이다.

前 노사정위원회 위원
前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現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現 이뉴스투데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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