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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것들과 이별하는 후배에게

기사승인 2018.11.09  15:2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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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다니던 대기업을 홀연히 그만둔 후배를 만났다. 가장으로서 생계 의무를 다하기 위한 힘줄 같던 직장이었다. 대학원 졸업 후 선생의 꿈을 접고 느닷없는 결혼을 한 그였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늘 작심했지만 결행하기까지 숱한 불면의 밤을 보냈으리라. 아직 대학에 다니는 딸과 올해 수능을 앞둔 딸이 있음에도 이제 할 만큼 했다는 책임감에서 벗어나고 싶다고 했다. 조직 내 관계에 치여 사느니 한 번이라도 온전한 자신의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다. 못다 한 공부를 끝내고도 싶어 했다. 가슴은 이해되나 호구지책에 쉽지 않은 결기였을 것이다. 관습처럼 굳어진 출근도, 고된 업무도, 의무 같던 술자리도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후,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늠하기 어렵고 막막하다고 했다. 외로움이 가을 단풍처럼 묻어 나왔다. 대개 직장인들은 후배처럼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다. 무리 속에서, 노동 속에서, 관계의 포만감을 인위적으로 느껴왔기에 고독을 느껴볼 겨를이 없었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내 경우에도 가까운 이들이 조직 내 인간관계에 치여 행여 외롭다는 술자리 고백을 듣게 되면 ‘내가 무심했었나’하는 엇나간 자기검열이 먼저 들곤 했다. 그렇게 조직 내 타인의 고독은 솜털 같은 가벼움으로 다가서기에 공감이 어려운 감정이다. 자신을 챙기고 살기에도 급급하므로.

나이 오십이 넘어서니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은 부단히도 저항하고 자라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립적인 것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이젠 외로움을 호소하는 지인들에게 치기 어리고 설익은 조언이지만 인간이 고독하다는 것은 홀로 서있다는 자주적 현상임을 말해주곤 한다. 사회의 주어진 틀을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당연하다 믿는 그 너머를 호기롭게 상상하고 무언가를 도모할 때 비로소 나다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설령 무리 속에서 이탈해 잠깐 고독해지더라도 말이다. 먹고사는 것이 급선무지만 퇴직은 또 다른 나를 찬란하게 찾아가는 선택이다. 그것이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일지라도.

날로 격변하는 세상은 무리 속에서 처지고 더딘 걸음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로 인해 조직 내에서 어떤 상처는 타인에 대한 서늘한 흉터로 남는다. 대개 사람들은 자신의 그 모진 흉터로 타인을 응시한다. 수렵의 일상에서 형성된 얕은 관계다 보니 공감보다 자신의 경험치를 대입하고 상대의 아픔을 규정한다. 조직 내 외로움의 이유이다. 그래서인지 직장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은 일보다 사람 관계의 지난함을 토로한다. 퇴직 후 일상은 익숙하지 않다. 힘들고 아프더라도 용기 내어 나의 걸음을 내디딜 때 나는 훌쩍 자라나고 나다운 나를 사랑하게 되지만 매우 지난한 과제이다. 누구나가 부대끼면서 퇴직과 이직을 꿈꾸지만 한 달에 한 번 투여되는 모르핀 주사 같은 급여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집단 속에서 인정을 받든 못 받든 자신의 줏대와 존재에 대한 자유로움이 있다면, 먹고사는 최소의 비용만 노동으로 수확할 수 있다면 나를 옥죄여가며 어설픈 관계에 그리 집착할 이유는 없다. 너무 이상적인가. 그렇지 않다. 묵직한 주체적 삶은 생계도 의연하기 때문이다. 

집단에 속해 불안전한 일상을 구걸하는 방식으로는 나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발전은 익숙한 고정관념을 해체할 때 가능하다. 집단의 규칙은 대체로 견고하게 현재를 유지하는 쪽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후배처럼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이들은 퇴직 후에도 자신의 처세와 관계의 서툶을 자책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에 대한 죄책감이 황망하게 생성된다. 그러나 실은 나를 꾸짖는 목소리는 때로 가공된 허상이며 타인의 영향력이 개입한 오류다. 프로이트는 죄책감은 기본적으로 자기 처벌 욕구로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선 안 된다.

조직 내에서 행복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을 때 많은 이들은 이직과 퇴직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후배처럼 결행을 했더라도 얼마 있지 않아 집단에서 멀어져 혼자되는 기분을 다스리는 건 결코 간단하지 않다. 하지만 조직 내에서 상대에게 무작정 맞추려 애쓰는, 지친 나를 마주할 때의 자괴감을 다스리는 것도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결국 무엇으로 힘들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라면, 조금이라도 나를 위하는 선택이 낫다. 그것이 합리적이며 온전한 선택이다.

막스 베버의 말대로 “분노도 편견도 없이” 조직 내에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퇴직 후 밀물처럼 쏟아져 오는 사람에 대한 분노와 실망들은 당연한 감정이다. 가슴으로 퇴직을 아파할 사람이 없었다는 후배도 그럴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처럼 미움의 분노가 다시 썰물처럼 빠져나가면 현실 속 자아와 마주하게 된다. 그 독립된 자아의 힘으로 자신의 재능을 찾아가면 될 터이다. 그 재능이 이제는 조직 내 상사가 기대하는 능력이 아닌 주체적 밥값을 하는 능력일 수 있다고 믿어도 좋다.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은 그래서 언제나 찬란하다. 참된 자아를 위해 능동적 배고픔을 감수한 후배의 용기에 환호를 보낸다.

前 노사정위원회 위원
前 한국폴리텍대학 청주캠퍼스 학장
現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이현수

<저작권자 © 이뉴스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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