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국내 최초로 건조된 풀컨테이너 전용선 한진 서울호 명명식에서 조중훈 회장이 기념사를 하고 있다.

[이뉴스투데이 이상헌 기자] 한진해운이 파산한 지 7개월, 국내 해운업은 현재 셋방살이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7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한진해운이 관장하던 유럽, 북미, 중동, 동남아 항로는 전부 외국 선사들에게 넘어갔으며 해운동맹을 통해 유치하던 환적물량도 공중분해 됐다. 

자연히 국내 제조기업들은 높은 물류비용을 감당할 수밖에 없게 됐고, 유럽, 남미 등으로 수출해야 하는 물건을 생산하는 기업들이 매달 1억이 넘는 추가비용을 감당하고 있다.

글로벌 선주들이 2020년 IMO 환경규제에 대응해 노후선박 교체 및 컨테이너선 대형화를 추진하고 있으나, 한국의 해운어은 초대형 컨테이너선 등 신형선 한 척 마련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머스크라인, CMA CGM 등 유럽선사들이 장기적으로 컨테이너 선박 대형화를 구현하고 있는 것에 비해 당장의 위기 모면에만 급급하고 있는 한국 정부의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한 때 백사장밖에 없었던 이 땅에서 세계 1위의 조선업과 7위의 해운업을 반세기만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정주영, 조중훈 등 1세대가 남긴 저돌적 기업가 정신이었으나 반년 만에 이를 물거품으로 만드는 교각살우(矯角殺牛)의 우를 범했다는 것이다.

조선산업의 대부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은 "최근 1~2년 동안 우리가 머뭇거리는 사이에 중국과 일본은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며 "한국도 이제 겨우 장년에 불과하네 벌써 넋을 놓은 것이냐"고 우려했다.

일대일로 정책을 통한 해양굴기를 꿈꾸는 중국 정부는 최근 3000여 곳에 달하던 군소 조선소를 300개로 줄이는 한편, 우량 조선소와 국영 조선소를 통폐합해 8곳으로 줄여 대형화와 기술력 집결을 도모했다.

이 결과 한국과 규모 면에서 경쟁할 수 있게 되었으며 LNG선, 대형 컨테이너선 등 고부가가치선 시장에도 경쟁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리고 지난해 IHI마린유나이티드와 유니버설조선을 합병해 세계 4위 규모의 재팬마린유나이티드(JMU)가 설립됐고 미쓰비시중공업과 이마바리조선이 MI LNG를 설립했다.

조선·해운업의 동반 추락은 한국경제의 본질적 위기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으로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조선3사가 프랑스 컨테이너선사 'CMA CGM'이 발주한 2만2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수주전에서 중국 업체에 패배한 것에서 정점을 이뤘다.

신 회장은 "수출제조업의 97.6%를 해양에 의존하는 나라이면서도 조선·해운업에 대한 이해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미국과 유럽을 향한 운임수입 기준 3조원 가량의 상업항로까지 소실하며 국적 컨테이선은 동·서로 두바이·LA에만 그치고 있다. 

한진해운과 현대상선의 물동량 점유율 합계는 2015년 연간 평균 11.9%에서 2017년 1~7월 평균 5.7%로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반면 같은 기간 일본은 올해 닛폰유센, 쇼센미쓰이, 가와사키키센 등 3대 해운사를 통합시키며 컨테이너 사업 점유율 7%로 세계 6위권 진입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해운업계 한 관계자는 "한진해운 파산으로 아직도 많은 투자자들이 빚더미에 고통을 당하고 있다"며 "기관투자자,개인투자자, 하청업체 등이 입고 있는 피해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고 푸념했다.

2000년대 초반 한진해운의 컨테이너가 영국 런던 템즈강에 위치한 한 교각을 지나고 있다.

한진해운은 지난 1977년 5월 고 조중훈 창업회장이 수송보국(輸送報國)의 꿈으로 무너져가는 대한선주를 인수하며 한국 최초의 민영 컨테이너선사다. 이에 앞서 대한항공도 무너져가는 공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탄생했다. 

박정희 정부는 1968년 11월 심각한 경영난에 허덕이고 있던 대한항공공사를 오랜 검토 끝에 민영화하기로 결정했다. 

국내 최초의 항공사는 1948년 신용욱이 순수 민간자본으로 설립한 대한국민항공KNA이었다. 하지만 KNA는 6·25전쟁과 청랑호 강제납북(1958. 2. 16) 등의 비극을 맞으며 쇠퇴했다. 결국 1961년 7월 4일 신용욱의 자살과 함께 KNA시대는 막을 내렸다. 

국적항공사 부재란 공백을 메우기 위해 정부는 ‘대한항공공사’를 출범시켰으나 부진한 수요로 누적되는 적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어려운 부탁이 있소." 1968년 여름 어느날 청와대 접견실, 조중훈과 독대한 박정희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재임 중에 전용기는 아니라도 우리나라 국적기 타고 해외 나들이를 한번 하는 게 소망이오. 또 베트남에서 휴가를 나오는 우리 장병들이 외국 비행기를 타는데 장병들의 사기도 문제려니와 목숨 걸고 벌어온 귀중한 외화가 낭비되고 있소. 조사장께서 대한항공공사를 맡아주시오."

조중훈은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이에 조 회장은 탁자 위 찻잔만 응시했다. 베트남에서 수송사업으로 큰 돈을 번 그였지만 부실덩어리를 떠맡는 것은 내키지 않으나 납입자본금 15억원(5년 거치 10년 상환)에, 누적 적자를 포함한 부채를 그대로 떠안는 조건으로 인수했다.

한진해운은 컨테이너·벌크선·탱커선·LNG선 등 200여척의 선박으로 전세계에서 연간 1억톤 이상의 화물을 수송한 바 있다. 2000년대 초반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한진 보스톤호'가 미국 시애틀항에 정박하고 있다.

대한항공공사가 보유한 항공기는 8대, 그나마 DC-9 제트기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수명이 다 된 프로펠러 비행기가 전부였다. 

청년시절 선원이었던 조중훈에겐 바다 진출도 꿈이었다. 컨테이너선 중심 해운회사를 구상하고 있던 1977년 초,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려갔다. 

이번엔 "대한항공 성공의 경험을 살려 해운에도 힘을 써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는 곧바로 한진해운을 발족(1977. 5)하고 1만8천 톤 급 컨테이너선 네 척을 발주했다. 그러나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1979년 제2차 오일쇼크로 인한 원가 상승으로 해운 시장에는 극심한 불황이 닥쳤다.

어렵사리 10년을 버티던 1986년 10월, 조중훈은 부실 해운회사 하나를 인수해달라는 제안까지 받는다. 1968년 대한해운공사가 민영화되면서 출발한 대한선주가 그것이었다.

감량 경영에 돌입해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업체 인수에 손댄다는 것은 무리라 판단해 두 번을 거절했으나 세 번째 요청이 들어오자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 유일의 육해공 종합수송업체로서 업계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면서 자기 타산만 고려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 그는 결국 4천억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고 회사를 인수했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회장이 출항을 앞둔 컨테이너선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 회장이 이러한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노선합리화와 신형선 도입을 통한 적극적인 구조조정이었다. 

조 회장은 곧바로 노후 선박들은 고철가격으로 과감히 처분하고 신형 경제선(經濟船)을 도입했다. 아울러 노선을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정기 스케줄을 편성해 비용을 줄이며 경영구조를 개혁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95년 한진해운의 매출액은 1조9천억원을 넘어 국내 선사들 가운데 1위, 세계시장점유율 7위로 올라설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2016년 한진해운의 퇴출 사태와 함께 추락의 연속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경쟁에서 기업의 ‘흥망성쇠’는 당연하지만 이러한 사태가 조선‧해운업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오너들의 주인의식 부재로 인한 것이기에 뼈아프다.

신동식 회장은 "정몽준, 이재용 회장 같은 분이 과연 각 지역 조선소를 방문해 현장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파악이나 하고 있을지 의문"이라며 "할아버지나 아버지 때 이룩한 산업의 결과를 그냥 이어받고 수익성만 점검하는 주인의식 부재가 가장 큰 위기의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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